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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방법원_2019고합365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1. 23. 21:39

도대체 아이들의 목숨조차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면서, 무슨 복지를 논하고, 어떤

이념을 따지며, 어떻게 정의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동반자살이라는 워딩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온정주의적 시각을 걷어

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해된 아이의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다.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개인에게 책임을 온전히 묻기 어려운 정신질환

자 범죄의 경우에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시각이 많음에도, 유독 부모라는 사정이 관

대한 처벌의 이유로 거론되는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 어

떤 경우도 용납될 수 없는 중범죄다. 형사정책적으로 볼 때도 자녀 살해 후 관대한 처

벌을 노린 자살 시도와의 구별도 사실상 용이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살해 후 자살

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다. 사회구조적 요인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하

더라도, 이 책임을 온전히 국가와 사회에게로만 돌릴 수 없다.

3)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가해 부모의 범행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발생 원인을 가해 부모의 게으름, 무능력, 나약함 등에서 비롯된 개인적 문제로

만 치부해버리는 시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각은 사회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줄어들게 할 수 있다. 살해 후 자살 위험이 감지되

거나 시도가 이뤄졌을 때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

해야 한다. 범행에 이른 경위에 개인의 문제 못지않게 사회구조적 문제가 작용하고 있

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이상, 가해 부모에 대한 단죄만으로 이런 범죄를 막을 수 없다.

중범죄임을 선언하고 단죄함과 동시에, 당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면 우리가 맡아 키

우겠다고, 최소한 당신이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우리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자신 있게 공표하고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살해 후 자살 범행에 대한 온정주의의 기저에는, 부모 없는 아이들, 극도로 궁핍한

아이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앓는 아이들을 굳건하게 지지해 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불신과 자각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러한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대한

민국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버팀목 역할도 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나라였는가.

우리 사회도 그러했는가. 지금도 그러한가. 많은 노력에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막지 못

했고 계속 재발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피해 아

동과 피고인 가족을 장시간 치료하고 지켜본 담당의사의 탄원서 내용 (… 김아동 양의 죽

음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일지 모릅니다. 한 부모에게, 한 가족에게만 자폐와 같은 발달

장애 자녀를 책임지우는 것은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지 못 합니다 …) 을 보면, 현재 대

한민국에서 장애아동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한 개인과 그 가족에게 얼마나 힘들고

가혹한 환경인지 절감하게 된다. 피고인 개인을 비난하면서도 중벌에 처할 수 없는 이

유는, 결과에 상응한 적정한 형벌과 실제 선고되는 형벌 사이의 차이만큼이 바로 국가

와 사회의 잘못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이 우리 잘못이다. 선고되지 않은 나머지 형이 우리가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가정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

든 재발될 우려가 있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피눈물 흘

리고 울음 삼키며 슬퍼하는 일 [허난설헌 ‘곡자(哭子)’ 중] 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아동보호를

위한 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정비해야 한다. 나아가 사회안전망

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위험군 가정에 꾸준히 개입하고 감시하며, 이들

을 배려하고 치료해야 한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극단적 선택의 트리거를 당기게 했

는지도 면밀히 조사해서 밝혀야 한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요인들을

찾아 없애야 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이런 조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최소한 가난과 장애와 타인의 불행을 조소하거나 절망 위에 또 절망을 한

짐 부리는 짓만은 그만둬야 한다. 당장 공감하고 행동할 수 없더라도 장애와 불행을

혐오하고 조롱하진 말아야 한다.

4) 마지막 호명이길 바란다

‘아리따울 ❍ ’와 ‘ ❍ ’ 자를 이름으로 쓰는 9살 아이가 친모에게 살해된 이 사건을

보며 당원은 참담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한 아이의 돌이킬 수 없는 애석

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피고인을 엄하게 단죄할 수만은 없는 여러 사정을 지켜보며,

과연 무엇이 피고인에게 합당한 형벌인지, 이런 사건에서 가해의 궁극적 책임은 누구

에게 있으며 피해자는 과연 누구인지, 자폐와 발달장애를 가진 아동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해 살아 왔음에도 아동이 호전되지 않고, 개인회생을 신청할 정

도로 경제력이 파탄 난 상태에서 결국 우울증으로 충동적인 범행에 이른 피고인을 구

금하는 것이 맞는 지, 이 비극적 결과를 온전히 피고인과 그 가족에게만 묻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피고인의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우리가 섣불리 피고인을 비난할 수 있

는 지에 대해 숱한 의문이 들어, 형의 정도와 피고인의 신병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그 고민의 끝에 당원은, 유리한 정상을 모두 참작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불행이 아

무리 견디기 힘들더라도, 아이를 살해하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음

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의 생명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어떤 가

치도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다. 아이

의 생명을 앗아간 이런 참혹한 범죄를 두고 참작할만한 사정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고

통도, 그 어떤 변명의 존재도 단호하게 부정한다. 자기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인 동시에 반자연적 행위다.

아이들에게 출생의 자유가 없다고 죽음마저 그러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가난과

장애 때문에 행복이 담보되지 않은 삶이라도,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인생이

더라도, 이들의 미래와 생명은 그 누구도 좌우할 수 없다. 부모라도 그러하다.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 선택일지라도, 일단 태어난 아이는 한 부모의 자식에만

그칠 수 없다. 아동이는 생물학적 부모인 피고인의 아이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회적 부

모이다. 우리가 딸을 잃었다.

당원은 참담한 심정으로 애통하게 숨져간 아동이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이 이름

이 아동학대로, 동반자살이라는 명목으로 숨져간 마지막 이름이기를 또 다시 희망한다.

그것이 부질없는 기대임을 예감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끝까지 놓을 수 없는 희망

이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최소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으로

쉬이 스러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

들이 죽어야만 그런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의 무관심과 방임을 환기시키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어야 하는가. 아직도 숫자가 부족한가. 그렇지 않

다.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희생은 최초의 한 아이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부족한 건

언제나 공감과 행동뿐이다.

도대체 아이들의 목숨조차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면서, 무슨 복지를 논하고, 어떤

이념을 따지며, 어떻게 정의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다시 묻는다. 우리는 과연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5) 우리가 안전망이다

재판은 사회의 문제점을 미리 막아 내지 못 한다. 형사재판은 우물가에 서성이는

아이를 안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절차가 아니다. 아이는 이미 우물에 빠졌다. 형사재

판은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를 놓고 사후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다. 형사법정은 오직 한

사건, 한 개인만을 단죄할 뿐 국가와 사회를 단죄할 순 없다. 이 지점이 당원을 무력하

게 만든다. 아동이의 입에 물린 거품을 보며, 분홍색 잠옷을 보며 비통해 하고 또 비통

해 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아동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참혹한

기록을 상세하게 부기하는 이유는, 우물가에 서 있는 또 다른 아동이 때문이다. 가난하

고 마음이 불안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그 부모를 의지하기는커녕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 끔찍한 현실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것 말고, 이제 와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IMF와 금융위기를 겪으며 보았듯,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런 범행은 급

격히 증가한다. 최근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의 급속한 붕괴는 우리에게서 또 얼마나 많

은 아이들을 앗아갈까 두렵기 그지없다.

반복되는 이런 범행을 볼 때마다 당원은, ‘청테이프가, 번개탄이, 졸피뎀이, 수면유

도제가, 감기약이, 찢어진 약봉지가, 빨랫줄이, 둥글게 말아 쥔 손아귀가, 열려진 옥상 문이, 갑작스런 고급 햄 반찬이, 분에 넘친 장난감이, 예상치 못한 선물이, 계획에 없던

가족여행이, 혼자 남겨진 인형이, 발에 묻은 그을음이, 부러진 손톱이’ 두렵다. 우리의

망각과 무덤덤함이 무섭고 또 무섭다. 어떤 이의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는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 되는 현실은 얼마나 서글픈가.

아이를 키우는 세상 모든 어머니가 아이에게 할 말은 응당 이러해야 한다. (…)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고 / 비 올 때면 꽃잎마냥 비도 흠뻑 맞거라 / 고추잠자리

메뚜기도 따라 잡고 / 따끔따끔 쏠쐐기에 질려도 보려무나 // 푸르른 이 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 백지같이 깨끗한 네 마음속에 / 또렷이 소중히 새겨 넣어라 / 이 엄마 너

의 심장은 낳아주었지만 /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여야 할 피는 / 다름 아닌 너 자

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 네가 바라보는 하늘 / 네가 마음껏 뒹구는 땅이 / 네가 한생

토록 안고 살 사랑이기에 / 아들아, 엄마는 그 어떤 재간보다도 / 사랑하는 법부터 너

에게 배워주련다 (…) (렴형미, <아이를 키우며>)

아동이가 됐어야 할 눈사람도, 바라보고 뒹굴었을 하늘과 땅도, 평생 심장에 품고

살았을 사랑도, 푸른 이 땅의 아름다운 모든 것도 아동이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졌

다. 엄마가 아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약 먹어라, 문 꼭 닫아라, 자자, 좋은 곳으로

같이 가자’가 되는 세상은, 얼마나 비통하고 또 비통한가.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할 순

있지만, 일단 뛰기 시작한 심장은 그 누구도 멈춰 세울 수 없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

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

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 (폴 오스터 <달의

궁전>) .” 폴 오스터의 말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타인에 대한 연민 외에는 이처럼 극단적인 절망과 고통에 맞설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애로 서로 깍지 낀 두 손만이 최후이자 최선의 안전망이다. 우리가 안전망이다.

재판장       판사       박주영   _________________________

판사       김도영   _________________________

판사       정의철   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