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기타

의사의 치료중단과 형사책임, 이상돈(2003)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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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보라매병원사건 항소심에서 법원은 생존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환자보호자의 강력한 퇴원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퇴원시킨 행위를 살인방조죄로 판결하였다.

이 판결은 제1심 판결과는 달리 의사의 퇴원허락과 집행에서 ‘치료중단’의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그 대신 환자보호자의 퇴원요구와 관철만을 ‘치료중단’이라는 부작위의 살인행위로 평가하고, 의사의 퇴원허락과 지시 및 집행은 그 행위를 돕는 행위로 평가하는 법적 논리를 보여주었다.

의료계로서는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을 허락한 의사의 행위에 대한 법적 비난이 어쨌든 살인죄에서 살인방조죄로 약해진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렇지만 ‘부작위에 의한 살인방조범’이라는 형법해석학의 이론개념을 면밀하게 알지 못하는 의사들로서는 그런 강도의 법적 비난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살인죄든 살인방조죄든 의사의 치료중단을 범죄화 하는 것은 환자가 살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환자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의학적 판단과 법적 판단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합법과 불법이라는 이원적 코드에 의해 작동하는 법적 판단의 메커니즘에서는 환자의 생존가능성이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의학적으로 생존가능성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메울 수 없는 괴리는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과 ‘모든 치료의 유용성이 사라진 환자’, 그리고 ‘되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과정에 진입한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법적으로 의미 있는 정도로 차등화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법체계와 법 논리는 확실하게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의 중단(소극적 안락사)을 합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이는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을 허락한 의사의 행위를 살인이나 살인방조행위로 낙인찍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의학적 판단은 법적 판단의 논리에 예속되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법은 의료행위의 머리나 다리를 잘라서라도 꿰맞춰야 하는 ‘프로쿠로테스의 침대’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학적으로는 의료체계와 법체계 사이에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체계간 통합의 실패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단지 의사만이 아니다. 그 불이익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환자의 생명권을 상황이나 맥락의 특수성을 고려함이 없이 ‘절대적으로 처분 불가능한 것’이라고 외치는 자연법론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정의관념에 대한 열정과 충직을 무턱대고 자랑할 수만은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현실이 날로 복잡해지고, 가치판단의 구조가 중층화되어 가며, 사회문화도 통일성을 잃고 다양한 모습으로 갈래치고 있는 현상을 냉철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를 가질수록, 처분해서는 안되는 것이란 어떤 고정된 실체와 같은 정의의 내용이 아니라 합의를 창출하는 대화적 의사소통의 절차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서 법은 대화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테두리조건을 설정하는 데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절차주의적 법패러다임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정당화 모델이 된다. 그러므로 보라매병원사건의 경우와 같이, 환자가 퇴원해야만 했던 주된 이유인 치료비 부족을 국가가 직접 메워주거나, 메울 수 있게 하는 의료보험체계가 기능하지 못하는데도 왜 치료중단의 책임을 의사가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국가가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치료중단에 대한 법원의 살인 또는 살인방조죄 판결은 정당성을 창출하기 어렵다.

법원이 자신의 판결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회의를 제거하는 방식은 일반시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논리적 구성의 변환, 그러니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서 ‘작위에 의한 살인방조죄’로의 변환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판결의 결론이 시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성찰해보는 것일 뿐이어야 한다.

보라매병원사건 이후 환자의 퇴원을 두고 의료진과 환자가족 사이에 실랑이가 더욱 빈번해지고, 심각해지는 현상은 그러한 성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을 허락하는 의사의 행위가 관행화 되고, 의사윤리에 반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하부문화가 의료사회에 굳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치료중단에 대한 법적 책임의 귀속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

법이 사회의 다양한 하부문화를 권력적인 방식으로 진압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결코 정당성을 창출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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