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전 작은 전쟁을 치뤘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비정규직 전공의 주제에 대형병원의 정규직 간호사와 맞서 싸우는 일은 외롭고, 고탈프고,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마저 협상의 테이블에 올리려는 그들의 만행을 보고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눈치보며 적당히 타협해서 살면 그만인 문제라고 조언키도 했지만, 적어도 의사면허를 가진 의료인의 한사람으로서 '환자'를 놓고 거래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십년을 그곳에서 뿌리내린 토착세력과 외부에서 갓 들어온 나의 전쟁은 패배가 불보듯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옥같았던 1년차 생활은 배로 힘들어졌고,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옥죄여왔다. 하지만 절대 지고 싶지 않았기에, 근 3일간을 뜬 눈으로 보냈다. 하지만 하루 500여건이 넘는 call과 수많은 1년차의 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일을 견디기에는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내 그릇이 작았다.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전혀 notify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간호기록은 교모하게 수정되었으며, 환자 혹은 보호자와 주고 받았던 말들은 모두 곡해되고 와전되어 입을 타고 전해졌다. 급기야 내가 하지 않았던 말과 행동까지 이상한 소문과 함께 포장되어 병원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환자의 생명이 달린 일마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며 미루거나 방치해두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일은 내 스스로가 허락지 않았다. 끝까지 환자가 죽던 살던 자신들의 일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결코 이 싸움을 타협으로 마무리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급기야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강성 보건의료 노조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옥죄여왔고, 나는 사직할 각오로 그들에게 맞섰다.
그들은 끝까지 혈압이 조절되지 않는 뇌출혈 환자에게 혈압강하제 정맥주사는 인턴잡이라며 끝까지 미루고 주지 않았으며 검사 도중 절혈압성 쇼크로 실신한 환자를 아무 말없이 퇴원시킨 일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사과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의 전공의들과는 다르게 공격적 자세로 나오는 나를 더욱 경계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이 일은 상부까지 와전되어 전해졌고, 급기야 내가 가운을 벗고 병원을 나오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함께 일했던 상급년차는 내 상황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려 애썼지만, 역시나 같은 비정규직의 한계만 느낄 뿐이었다.
여지껏 5개월 남짓 일하며 단 한순간도 신경외과 1년차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던 일을 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익숙치 않은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일하며 잘 알지 못해서 저질렀던 실수는 몇차례 있었지만, 의사로서 태만하거나 나태해 본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고 오히려 남들보다 열심히 하려 늘 노력했었다. 그 결과가 이처럼 가운을 벗게 되는 일이라 생각하니 슬프다. 하지만 후회는 결코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내게 그리고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동기들과 윗년차, 그리고 나를 믿어주던 간호사들로부터 병원으로 돌아오라는 문자와 전화가 수십통이 오고 있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혹자는 더럽고 엿같아도 몇달만 참고 지내면 끝이라며 견디라 하지만 환자의 치료를 놓고 정규직 귀족 노조원들과 거래해야 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다.
출처:가운을 내려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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